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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로락탐과 나일론산업 작성일 2020-01-06 조회수 37831

카프로락탐과 나일론산업

 

카프로락탐이 세계적 화학산업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발명 당시 ‘꿈의 섬유’로 불려지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나일론을 생산하는 원료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은 1935년 미국의 화학자 캐러더스(Wallce H. Carothers) 박사가 폴리아미드를 발견하여 시제품을 만들고, 이를 기초로 하여 세계적 화학회사인 듀퐁(Dupont)이 상품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실용화되었다. 1938년 9월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든 섬유’ 또는 ‘거미줄처럼 가늘고 강철보다 강한 기적의 섬유’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선전을 하면서 비로소 나일론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일론은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로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며, 1939년 열린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바로 나일론-66이다. 

나일론-66은 아디핀산과 헥사메틸렌다이아민을 에탄올 수용액에 용해시켜 나일론염을 형성하고, 이것을 내부압력 15기압의 고압 반응기에서 250℃까지 가열하면 아디핀산의 -COOH기와 헥사메틸렌다이아민의 -NH2기 사이에서 아마이드 결합이 생겨 만들어진다. 이 나일론은 250~260℃에서 녹으며 10,000~20,000정도의 분자량을 가지고 있다.

나일론-66은 각각 6개의 탄소를 갖는 두 가지 화합물로 합성되어 얻어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일론(Nylon)이란 이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허무라는 뜻의 ‘NIHIL'의 머릿글자 N을 따서 지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발명자가 허무하게 자살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즉 캐러더스는 그가 발명한 나일론이 세상에 등장하여 섬유혁명을 일으키기 1년 전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41세의 나이에 자살하였다. 그가 왜 자살하였는지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볼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실크보다 질기고 면보다 가벼우며 신축성이 뛰어난 나일론으로 만든 최초의 상품은 여성용 스타킹이었다.

듀퐁사는 1940년 이 스타킹을 시판하면서 자사의 여비서들을 모델로 동원, 사람들 앞에서 착용해 보도록 하는 홍보전략을 펼쳤다. 그 결과 실크스타킹보다 2배가 비싼값(1.25달러)인데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발명 다시 스타킹을 만드는데 국한하여 사용되던 나일론은 그후 낚시줄과 칫솔을 만드는 재료로 쓰여졌다.

그러다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낙하산․텐트․로프 등 군수물자를 만드는 데로 용도가 확대되자, 생산과 수요가 대폭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1952년에는 올리 나일론(Wooly Nylon)이 생산되어 스웨터, 내의 등을 만드는 소재가 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나일론-66보다 발전된 공정에 의해 생산된 제품이 나일론-6이다.

나일론-6은 카프로락탐을 원료로 하여 중합공정을 거쳐 나일론 원사로 만들어진다. 중합공정은 나일론의 원료인 카프로락탐을 중합시켜 나일론 칩(Nylon Chip)을 제조하는 공정으로, 용융조에 카프로락탐을 가득 채우고 열을 가해 용융시킨 뒤 혼합조에서 안정제와 중합촉매를 첨가하여 중합탑으로 보낸다. 중합탑에서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중합을 계속한다. 중합된 나일론이 국수 가락 모양으로 압축되면 냉각조에서 급랭시켜 절단기에서 쌀알 크기로 절단하게 되는데, 이것을 나일론 칩이라고 한다. 이칩은 다시 세척탑으로 이송되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약 10%의 미반응 물질은 회수되고, 세척된 칩은 건조기로 보내져 건조된다.

회수된 미반응 물질은 다시 정제되어 사용되고, 건조된 칩은 저장탑으로 보내지는 등 공정을 거치면서 나일론 원사가 생산되는 것이다.

나일론에는 나일론-6, 나일론-11, 나일론-66, 나일론-610 등이 있는데, 이는 열에 녹는 점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 것이다. 나일론-6은 215℃에서 녹지만 나일론-66은 225℃가 되어야 녹는다.

나일론은 가볍고 질기며, 물에 젖어도 강도가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감촉이 좋으며 잡아당기는 힘이 강하다는 것 등이 장점이지만, 피부에 닿을 때 쾌적감이 적다는게 단점이다.

 

나일론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해방을 맞아 미군이 진주하면서부터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과 밀수로 유입되는 물품이 많아지면서 시중에 나돌기 시작하였다.

나일론이 무역을 통해 정식으로 한국에 수입된 것은 1954년 말 무역회사인 개명상사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부터였다. 개명상사는 설립 후 일본에서 수입한 나일론 사의 한국 내 수요창출을 위해 나일론사의 쓰임새와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석산양말이 나일론 양말을 만든 것이 한국 나일론산업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나일론사는 여성스타킹, 의류용 원단으로까지 사용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나일론의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1957년 4월 삼경물산이 대구에 한국나이롱(현(주)코오롱)을 설립, 우여곡절 끝에 1959년 1월 나일론 스트레치공장을 정상가동하면서부터였다. 나일론이 발견된지 27년이 지난 때의 일이었는데, 당시 1인당 국민소득 (GNP)은 57달러였다. 원사를 가공해서 보들보들하게 해놓은 나일론 스트레치사는 당시 수입을 하여 사용해야만 했는데 수요처는 양말, 스타킹, 란제리를 비롯한 여성 속옷 등이었다. 이중 양말공장들은 앞다퉈 나일론 양말 생산에 나섬으로써 본격적인 나일론 양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한국나이롱은 이후 1964년 1월 나일론-6라는 필라멘트 나일론사를 생산하는데 성공, 명실상부 한국 최초의 나일론 생산업체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주요 생산물은 농수산물이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백 25달러였다.

한국나일롱은 1968년 시설을 증설해 하루 10톤씩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는 한일나이론주식회사가 스위스 인벤타(Inventa)사 및 우하그(Uhag)사와 차관계약을 체결하여 경기도 안양에 일산 1.3톤 규모의 나일론 필라멘트공장을 건설하였다. 당시 한국의 나일론사 소요량은 연간 3천5백 톤이었던데 비해 생산량은 1천3백68톤으로 자급률은 39%에 불과했다. 

1966년에는 효성물산이 동양나이론주식회사를 설립, 울산에 공장을 건설해 1968년 4월 카프로락탐에 기초한 나일론 원사용 중합물을 뽑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산 규모 12톤의 근대적 나일론 원사 생산업체가 탄생하였다.

이 공장은 1968년 7월 16일 준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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